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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옥 리더십 조국과 인류애를 바친 영웅, 그의 아내 아이다 서 여사

by goodleader01 2025. 6. 1.

프롤로그

1919년, 로스앤젤레스에서 한국인 독립운동가의 아들로 태어난 김영옥은, 그 어떤 이념이나 인종의 장벽에도 굴하지 않고 오직 자유와 인권이라는 숭고한 가치를 위해 평생을 바쳤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의 참혹한 전장에서 빛나는 리더십과 용기를 보여준 그는, 전역 후에도 사회 곳곳의 소외된 이들을 위해 헌신하며 진정한 휴머니스트의 삶을 살았습니다.

 

겸손함 속에 위대한 업적을 감추었던 그, 그의 이야기는 오늘날 우리에게 '나'가 아닌 '우리'가 이룬 업적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위대한 유산으로 남아있습니다.


내용: 영웅의 일대기

01. 어린 시절과 성장: 정체성, 역경, 그리고 꿈

김영옥은 아버지 김순권(항일 지사)과 어머니 노라 고 사이에서 4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바로 위 누나인 윌라 김은 훗날 토니상을 두 번이나 수상하는 유명한 의상 디자이너가 됩니다. 

그는 로스앤젤레스 벙커힐에서 자랐고, 부모님이 운영하는 식료품점에서 노동하는 등 평범한 삶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독립헌금으로 가정 형편은 늘 어려웠습니다. 벨몬트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로스앤젤레스 시티 칼리지에 진학했지만, 유색인의 대학좋업은 의미가 없다고 판단,  1년 만에 학업을 중단해야 했습니다.

 

그는 인력거 끌기, 농장 중노동, 외판원. 자동차 기술배우기 등으로 전전 했지만  당시 만연했던 인종 차별로 인해 직업을 구하기도 어려웠다.  하지만, 그의 삶은 1941년 1월 31일, 미 육군에 징집되면서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합니다.

02. 전쟁 영웅으로서의 빛나는 업적

김영옥의 군 경력은 그의 용기와 탁월한 리더십으로 점철됩니다.

  • 제2차 세계대전 (1941년 – 1946년):
    • 1943년 2월, 소위로 임관한 그는 일본계 미국인들로 구성된 육군 100보병대대 소대장으로 부임합니다. 당시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였기에 부대장이 전출을 제안했지만, 그는 "여기에는 일본인도 한국인도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미국인이고 같은 대의를 위해 싸우고 있습니다"라며 남기를 고집했습니다.
    • 이탈리아와 프랑스 전선에서 그는 놀라운 활약을 펼쳤습니다. 살레르노에서 첫 전투 중 부상으로 은성 훈장퍼플 하트를 받았고, 몬테 카시노 전투에서는 적진에 침투해 독일군을 생포하는 대담한 작전으로 미국 수훈 십자장과 이탈리아 최고 무공훈장인 십자무공훈장을 받았습니다. 프랑스 전선에서도 중상을 입었지만, 그의 공로로 크루아 드 게르 훈장과 프랑스 최고 훈장인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습니다.
  • 한국 전쟁 (1950년 – 1952년):
    • 제2차 세계대전 후 전역하여 사업을 시작했지만,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조국을 위해 망설임 없이 재입대했습니다. 그는 "한국인으로서 아버지의 나라를 돕고, 미국 시민으로서 한국이 미국에 진 빚을 갚는 길"이라는 신념으로 총을 들었습니다.
    • 미군 최초의 유색인종 전투부대 대대장을 맡아 구만산, 탑골, 금병산, 수안산 전투 등에서 연전연승하며 중부전선을 60km 북상시키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습니다.
    • 전투 중 아군 오폭으로 심각한 부상을 입기도 했지만,  귀국 결정에도 불구하고 2개월 만에 회복하여 전장으로 돌아왔습니다.
    • 그의 대대는 서울의 5경천애인사 고아원의 500명이 넘는 전쟁 고아들을 보살피는 인도주의적인 활동도 펼쳤습니다. 그는 군 지휘관으로서 뛰어난 전술 전략을 보여줬으며 자신보다 주변을 돌보는 헌신적인 리더십으로 인종차별의 벽을 뛰어넘었습니다.
    • 1952년 9월, 한국전쟁에서의 전투 임무를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갔습니다.

03. 군 경력과 가족: 희생과 헌신의 동반자

김영옥 대령은 한국전쟁 이후에도 군에 남아 1972년까지 총 30년간 복무했습니다.

  • 1959년 중령으로 진급했으며, 독일에서 참모 장교, 미 육군 지휘참모대학 교관 등을 역임했습니다.
  • 1963년에는 한국으로 돌아와 주한 미군 고문관으로 복무하며 한국군 동원계획의 획기적 발전, 미사일 부대 창설 등 한국군 전력 증강에 크게 공헌, 965년에 한국 군사고문단 근무를 마치고 미국으로 귀국하였습니다. 

그의 배우자인 아이다 서 여사는 김영옥 대령의 곁에서 묵묵히 희생과 헌신을 함께했습니다. 사 아이다 서 여사는 다음과 같은 삶을 사셨습니다.

  • 간호 장교 복무: 전쟁이 끝난 후 미국으로 돌아오지 않고 간호 장교로 군에 복무했으며, 진급 조건으로 독일 주둔 미군부대에서 근무했습니다.
  • 건강 문제와 자녀: 영국 애전병원 근무 시 중병으로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이에 김영옥 대령 부부는 세 명의 의붓아들인 제리 서(Jerry Surh), 톰 서(Tom Surh), 코리 커버트(Corey Covert)를 양자로 들였습니다.
  • 한국 동반 체류: 1963년 김영옥 중령이 한국 군사고문단으로 근무할 당시 아이다 서 여사도 동반하여 한국에 체류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04. 제2의 인생: 사회적 약자, 공동체를 위한 봉사

1972년 군에서 은퇴한 김영옥 대령은 80% 장애 판정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남은 삶을 오직 사회와 공동체에 바쳤습니다. 그는 로스앤젤레스 지역의 인종 평등, 청소년, 노인, 빈곤층을 위한 옹호자로서 활발히 활동했습니다.

  • SSG(Special Services for Groups), 유나이티드 웨이, 코리아타운 청소년 커뮤니티 센터(KYCC), 한국계 미국인 연합(KAC), 태평양 아시아 가족 센터, 한국 건강·교육·정보 및 연구 센터 등 수많은 비영리 단체의 설립과 운영에 참여하며 소외된 이들을 위한 서비스 구축에 앞장섰습니다.
  • 자신의 업적을 드러내지 않는 겸손한 성격으로, 조카 다이앤 맥매스 씨는 그가 돌아가신 후 장례식장에서야 그의 위대함을 알게 되었다고 회고했습니다. 그는 항상 "내"가 아닌 "우리"가 이룬 업적임을 강조했으며, 자유와 인권의 가치를 위해 싸웠다고 말했습니다.
  • 한국인이라는 것을 항상 자랑스럽게 생각했으며, 일본계 미국 사회에서도 한국의 경제 발전에 대해 설파하는 등 공동체 의식을 강조했습니다.

05. 영원한 유산: 기억되고 이어지는 정신

김영옥 대령은 2005년 12월 29일, 86세의 나이로 로스앤젤레스에서 암으로 별세했으며, 하와이 호놀룰루의 국립 태평양 기념 묘지(펀치볼)에 안장되었습니다.

그의 정신과 업적은 사후에도 계속해서 기려지고 있습니다.

  • 그의 이름을 딴 영옥 김 아카데미(Young Oak Kim Academy) 중학교와 **영옥 김 한국계 미국인 연구 센터(Young Oak Kim Center for Korean American Studies)**가 설립되었습니다.
  • MSN닷컴이 선정한 "미국 최고의 전쟁 영웅 16인"에 포함되어 조지 워싱턴, 로버트 리, 더글러스 맥아더 등과 어깨를 나란히 했습니다.
  • 대한민국 정부는 그에게 최고 무공훈장인 태극무공훈장을 추서했습니다.
  • 2016년에는 한국계 미국인 지도자들이 그에게 미국 최고 시민 훈장인 대통령 자유의 메달을 사후 수여할 것을 촉구하는 캠페인을 시작했습니다.

에필로그: 진정한 영웅의 울림

김영옥 대령의 삶은 단순히 전쟁 영웅의 이야기를 넘어, 인종과 국경을 초월한 인류애, 그리고 사회적 약자를 향한 끊임없는 헌신이 얼마나 위대한 유산으로 남을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는 1972년 전역 이후 한인건강정보센터, 한미연합회, 한미박물관을 만드는 데 앞장섰고, 가정폭력 피해자와 위안부 피해자, 한인 입양아 등을 돌보는 데 여생을 바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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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닌 우리"라는 그의 철학은 이기심이 만연한 현대 사회에 큰 울림을 주며, 그의 겸손함과 강직한 신념은 오늘날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그는 진정으로 자유와 인권을 위해 싸웠고, 그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평생을 바친 '아름다운 영웅'으로 우리 기억 속에 영원히 살아 숨 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