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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옥 대령 장례식 교포 사회 소극적, 100대대 일본계 미군 참전 용사 적극적 주도 이야기

by goodleader01 2025. 6. 8.

프롤로그 

2005년 12월 29일, 한국계 미국인으로서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전쟁 영웅 김영옥 대령이 서거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장례식과 국립묘지 안장 과정에서 한국 교포 사회의 참여가 두드러지지 않고, 오히려 일본계 미국인 2세들로 구성된 100대대(100th Infantry Battalion) 출신 참전용사들이 주도한 사실은 당시 미국 언론, 특히 미주 한인 언론에서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당시 미국 언론 발표와 보도를 추적해보면, 다음과 같은 이유들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고 김영옥 대령

내용 분석 

01. 일본계 미국인 100대대의 주도와 그 배경

  • 공동의 전우애와 유산: 김영옥 대령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하와이 출신 일본계 미국인들로 구성된 100대대의 장교로 참전했습니다. 당시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였고, 부대 내에서 인종적 긴장이 있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김영옥 대령은 전입을 거부하며 "여기에 일본인도 한국인도 없다. 우리는 모두 미국인이고, 미국을 위해 싸울 것이다"라고 말하며 부대에 남았습니다. 그는 이 부대에서 뛰어난 리더십과 용맹함을 보여주며, 이후 442연대 전투단과 합류하여 미국 역사상 가장 많은 훈장을 받은 부대로 명성을 떨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김 대령과 100대대/442연대 참전용사들 사이에는 깊은 전우애와 존경심이 형성되었습니다.
  • 'Go For Broke' 재단의 활동: 100대대와 442연대의 업적을 기리고 교육하는 'Go For Broke Educational Foundation'은 김영옥 대령의 생전부터 그의 업적을 적극적으로 알리는 데 앞장섰습니다. 2003년에는 그에 관한 영화 '잊혀진 용맹(Forgotten Valor)'을 제작하기도 했고, 프랑스 최고 훈장인 '레지옹 도뇌르' 서훈식도 LA 한인타운이 아닌 리틀 도쿄에서 진행될 정도로 일본계 커뮤니티가 그의 기념사업을 주도했습니다. 김 대령의 사망 후 영결식(2006년 1월 9일, 산타모니카 연합감리교회)과 하와이 호놀룰루 펀치볼 국립묘지 안장(2006년 2월 3일) 준비 역시 'Go For Broke' 재단과 후쿠이 장의사 등 일본계 측에서 주도했습니다.

100대대 참전용사 김영옥 대령 전우들(일본계 미군 출신)

02. 한국 교포 사회의 참여 부족 (또는 "소홀함")에 대한 당시 평가

  • 인식 부족과 관심 소홀: 당시 미주 한인 언론들은 고 김영옥 대령의 장례식이 일본계 커뮤니티 주도로 진행되는 현상에 대해 한인 사회의 '영웅 대접 소홀'을 지적하는 기사를 다수 보도했습니다. "미주 중앙일보"의 2006년 1월 5일자 기사는 "영웅을 키우고 간직할 줄 모르는 한인들의 좁은 시야가 김영옥 대령에 관해서도 극명히 드러난다"고 일갈하기도 했습니다. 즉, 김 대령의 위대한 업적이 한인 사회에 충분히 알려지지 않았고, 그에 대한 관심과 기림 활동이 일본계 커뮤니티에 비해 상대적으로 미흡했다는 자성적 평가가 많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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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적 유산의 공유 문제: 김영옥 대령은 한국전쟁에서 한국군의 현대화 작업에 기여하고 한미연합회(KAC) 등 미주 한인 사회 단체들의 태동에 관여하는 등 한인 사회 발전에도 큰 공헌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가장 빛나는 군사적 업적, 특히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활약은 100대대/442연대라는 일본계 부대와의 밀접한 연관성 속에 있었습니다. 당시 한인 사회는 그의 '한국인' 정체성과 한국 관련 활동에 더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었던 반면, 그의 폭넓은 군사적 유산을 '미국인'으로서의 보편적 영웅이자 '일본계 부대의 영웅'으로 포용하는 데는 상대적으로 시간이 걸렸다는 해석도 가능합니다.
  • 뒤늦은 추모 및 기념 사업: 김 대령의 서거와 일본계 커뮤니티의 주도적인 추모 활동을 계기로, 한인 사회 내부에서는 뒤늦게나마 그의 업적을 기리고 기록하는 작업의 필요성이 대두되었습니다. 언론인 한우성 씨의 전기 '영웅 김영옥' 집필 등이 이 시기 이후 활발해졌으며, 현재는 한국계 연방 하원의원들이 의회 금메달 추서를 추진하는 등 국가적 차원에서의 기림 노력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한국정부 태극무공훈장 수여
한국군 고급장교 김영옥 대령 묘지 방문

함의 및 에필로그 

 

결론적으로, 김영옥 대령의 장례식이 일본계 미국인 100대대 출신 참전용사들에 의해 주도된 주된 이유는 그들이 김 대령과 전장에서 형성한 특별한 전우애와 공유하는 역사적 유산 때문이었습니다.

 

반면, 한국 교포 사회는 김 대령의 위대한 업적에 대한 인지도가 상대적으로 낮았고, 그를 기리는 활동이 일본계 커뮤니티에 비해 미흡했던 점에 대한 자성적 목소리가 당시 언론을 통해 나왔습니다.

 

이는 영웅의 국적과 인종을 넘어선 보편적 가치와, 한편으로는 디아스포라 커뮤니티가 자국 영웅을 어떻게 기억하고 기념하는지에 대한 복합적인 문제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긴영옥 대령 절친 세미 리(올림픽 금메달 다이빙선수)